96년 영화 '구미호'로 데뷔한 이래 정우성은 줄곧 결핍된 캐릭터였다. 사랑에 굶주리고, 환경에 아파하며 그래서 늘 탈출을 꿈꿨다. 그런 부분은 일정 부분 배우 정우성이 아닌 인간 정우성과도 겹친다.
자기 자신을 늘 캐릭터에 투영한다는 그는 "'비트' 이래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민이는 현실에서 죽어서 소영웅이 됐지만 정우성은 그대로 남았다. 내 영화를 보는 청소년들에게 나도 살아 남았다. 너희들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중천'(감독 조동오ㆍ제작 나비픽쳐스)에서도 현실에서 좌절된 사랑으로 가슴 아파하는 퇴마 무사 이곽 역을 맡은 정우성과 만났다.
-나비픽쳐스 김성수 대표와의 인연이 두텁다.
▶'비트' 때부터 인연을 맺은 뒤 그냥 이런 작품이 있는데 하자라는 말만으로 계속 작품을 함께 했다. '태양은 없다' '무사' '중천'까지 작업 방식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전작인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중천'은 기억을 잃은 여자와의 사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기억이라는 코드가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연장선에 있지 않나라는 점에서 고민을 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연계하지 않도록 연기를 하면서 주의했다.
-상대역인 김태희와의 호흡은.
▶강력추천이다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 김태희가 광고에 나오는 모습과 극 중 소화의 모습이 겹쳐졌던 부분이 있었다. 바르고 맑은 모습이 소화와 맞는 것 같았다. 김태희가 첫 영화니깐 호흡이 딱 딱 맞아 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장에서 여배우로서의 존재감이 대단했다. 촬영에 임하는 자세가 딱 맞아 떨어졌다고 할까, 배우로서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충실했고, 작업 방식을 빨리 인지했다. 그러니 선배의 시도때도 없는 잔소리도 잘 들은 것 같다.(웃음)
-부드러웠던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이후 거친 캐릭터로 변신했는데.
▶필모그라피를 위해 작품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막연하게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계산을 할 주변은 없다. 후회를 남기지 않게 선택할 뿐이다. 어떤 작품이든 2년 뒤에 내가 이 작품을 왜 했을까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항상 선택에 후회는 없다.
-'중천'을 '무극'과 비교하는 시선도 있다.
▶분명히 '무극'이 '중천'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 CG도 그렇고. 제작비는 3분의 1도 안들었는데 어디 두고 보자는 시선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자극을 받아 제작진이 훨씬 공을 들였다. 나 역시 어떤 완성품이 나올지 기대된다.
-지난 10년간 항상 결핍된 캐릭터를 연기했다.
▶나는 캐릭터에 나를 투영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보니 내 캐릭터는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비트' 이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민이라는 캐릭터는 죽어서 소영웅이 됐지만 불우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힘들다. 그런 아이들에게 정우성도 살아 남았다는 것을 보여줘 꿈을 주고 싶었다. 정우성도 꿈을 이뤘다. 너희들도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그동안 맡은 캐릭터와 인간 정우성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불우한 환경이었다는 점. 중 3 때부터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팬레터도 받고 인기폭발이었다.(웃음) '똥개' 같은 경우 아버지와의 두터운 정이라는 점에서 대리만족도 있었다. 응석도 마음껏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20대를 벗어나 30대 중반으로 가다보니 이제는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 여러가지를 찾아보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을 하고 싶은 것도 그런 것 중 하나다.
-감독 데뷔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더 이상 늦추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20대에는 30대 전에 데뷔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제 30대를 넘어섰다. 그 때 연출을 하고 싶었던 작품과 지금 준비를 하는 작품이 다르다. 더 늦어졌다가는 지금 준비하는 작품과 또 다른 것을 준비해야 할 것 같기 때문에 더 늦춰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다. 내 작품에 출연도 할 수 있다. 배우로서 잃는 게 많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어찌보면 도전이요 보험이기도 하다.
ⓒ<박성기 musictok@>
-배우로서 현재 위치에 만족하나.
▶지금의 내가 좋다. 애 아버지도 할 수 있고, 청춘의 끝물에 있는 역도 할 수 있고. 안보여줬던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많다. 언젠가 이창동 감독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감독님 작품을 너무 좋아하는데 나는 안어울릴 것 같다고. 그랬더니 왜 안어울리냐고 하시더라. 탈출하려고 해도 탈출할 수가 없었던 80년대 분위기를 담은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
-함께 하고 싶은 배우가 있다면.
▶최민식 설경구 선배와 이야기를 하면서 같은 작품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서로 한 적이 있다. 좋은 시나리오가 있다면 해보고 싶다. 또 지금까지 나이 차이가 어느 정도 나는 여배우들과 작업을 함께 했다면 이제는 동년배 여배우들과 해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일본에서 한국 영화 중 가장 흥행했는데.
▶일본 영화 관계자들은 나를 한류스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사' 때부터 '데이지' '새드무비'까지 매 작품마다 꾸준히 팬들이 생기는 것 같다. 불처럼 뜨겁지는 않더라도 내 작품을 기대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작품 선정에 고민을 한다.
-할리우드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는데.
▶제의가 아주 없다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하지만 연기는 스포츠와 다르다. 언어와 감정으로 설득해야 한다. 언어가 하루 이틀에 충족되는 것도 아니고. 난 배우로서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장에는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어를 공부 중이다.
-드라마 출연 계획은.
▶아시아 시장에 정우성이라는 배우를 각인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드라마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안하겠다고 한 터라 작품 선정에 더욱 신중을 기하고 있다. 솔직히 관심이 있는 프로젝트도 있다. 하지만 다음 작품은 영화가 될 것 같다.
-항상 만나는 사람만 만나다 보니 폐쇄적이라는 평도 있다.
▶난 좋아하는 술집이 있으면 그곳만 가는 스타일이다. 노래도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물릴 때까지 계속 듣는다. 만나는 사람도 그렇다. 그러다보니 그런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울타리에서는 너무나 자유롭고 좋다. 또 그런 성격이다보니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영화 촬영장이 그리운 것 같다.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
▶영화를 완성하면 허탈해져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영화 속 상대 배역을 부르곤 한다. 그런 시간들을 이어가고 싶다. 15~20년 뒤에 존경받는 영화인으로서 자리를 지켜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