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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 냄새를 싫어하는 킬러와 자신에게 꽃을 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 영화 <데이지>에서 정우성과 전지현이 입은 새로운 옷이다. 친남매 버금가게 친한 사이지만 알고 보면 영화는 첫만남. 소박한 이름으로 화려하게 찾아오는 <데이지>는 두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영화다.

화려하진 않지만 사랑스러운 수줍음과 상냥함으로 눈길을 끄는 꽃. 데이지는 그런 꽃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 데이지의 꽃말은 숨겨진 사랑. 영화 <데이지>의 사랑은 바로 그런 사랑이다. 외로운 이들의 숨겨진 사랑은 우연과 필연의 손을 잡고 세 남녀를 찾아온다. 우연히 공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여자 혜영(전지현)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킬러 박의(정우성)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그녀 앞에 나설 수 없어 그저 누군가를 시켜 데이지를 보내며 먼 발치에서 혜영을 지켜본다. 언제부터인가 꽃을 보내오는 이름 모를 그를 사랑하게 된 혜영은 공원에서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정우(이성재)를 만난 후 자신이 기다려온 사람이 정우라고 믿는다. 마약 조직을 쫓고 있던 국제경찰 정우는 혜영이 기다리는 이가 자신이 아님을 알면서도 선뜻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이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박의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그 와중에 정우는 범죄 조직에 의해 박의가 죽여야 할 다음 표적이 된다.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게 되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대결을 벌이는 두 남자와 그들을 사랑하는 한 여자의 가슴앓이는 <데이지>라는 소박한 꽃이름과 달리 스타 캐스팅의 다국적 프로젝트로 태어났다. 일단 <엽기적인 그녀>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의 곽재용 감독이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시나리오를 <풍운> <중화영웅> <무간도> 시리즈의 유위강 감독이 연출했다. 여기에 홍콩 프로덕션의 합세, 네덜란드 올 로케이션 같은 화려한 외형들을 보건대 여자, 킬러, 그리고 국제경찰의 삼각 로맨스가 선 굵은 액션 러브스토리가 될 것이라는 선입견이 이미 생겨난 상태다. 킬러 박의를 연기하는 정우성은 그래서 벌써부터 걱정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만 조합해서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알아서 정립한 다음에 이런 영화겠지, 라며 보러 오겠죠. 그런데 생각했던 영화가 아니면 어 이거 뭐야, 싶겠죠. 걱정이에요. <데이지>는 정말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니까."

천천히 오르는 마음

전지현에게 <데이지>는 사실상 모험이었다. 우선, 세 남녀의 힘겨운 사랑이 자칫하면 익숙한 그림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고, 더욱이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 같은 '전지현 중심 프로젝트'를 겪고 난 후 선택하기엔 더더욱 어려운 영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심각하게 착각하고 있는 것 아냐? 끌리면 가는 거지' 싶어 마음을 고쳐먹었다. 물론 그래도 어려웠다. 한국인 배우가 네달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홍콩감독과 영화를 찍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엔 당연히 말조차 안 통했고 촬영하면서도 어떤 그림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전혀 감을 못 잡았다. 중간 중간 모니터를 보거나 러시 필름을 점검하는 한국식 현장도 아니어서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우연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계속 믿으며 지켜가려 하는 여자 혜영의 순애보는 외견상으로는 아주 특별하거나 귀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걸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인정하는 것이 전지현의 새로운 숙제였다. "흔해 빠진 캐릭터처럼 보여질 수도 있죠. 약간 비어 있는 느낌도 있고. 그래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데이지>에선 캐릭터에게 주어진 상황을 이해한 후에야 캐릭터 자체를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했죠."

왜 이런 뻔한 행동을 할까 싶지만 결국 나 같아도 그렇게 했을 거야, 라고 설득할 수 있는 연기. <데이지>는 전지현에게 그걸 원했고 그걸 가능하게 한 건 <여친소>의 경험 이후 얻게 된, 뭐든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다. 혹평이든 호평이든 마음을 열고 사람들의 반응을 끌어안으며 머릿속에 넘치는 온갖 복잡한 생각들에서 잠깐 떨어져 나와 스스로 그 모든 걸 흥미롭게 구경하는 태도. 자신을 둘러싸고 "이제 달라지고 싶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을 보는 전지현의 요즘 심정이 꼭 그렇다. "바로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지 말자 생각했어요. 뭘 하든 100% 만족할 순 없죠. 인생이 원래 매번 아쉬워만 하는 작업의 연속인 것 같고 내가 만났던 작품들은 다 운명적으로 내게 왔거든요." <데이지>는 전지현에게 급한 마음에 뛰어올라 가는 계단이 아니다. 주변 경치를 즐기며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을 천천히 올라가는 마음으로 만난 영화다. "지금까진 못 그랬는데, <데이지>에선 내가 정말 상대 배우에게 잘 녹아서 소화되고 함께 빚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끝내고 보니 잘했다 싶어요."

나는 달린다, 끝까지

곽재용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데이지>에 먼저 반한 건 곽재용 감독과 두 편(<엽기적인 그녀> <여친소>)이나 작업을 했던 전지현이 아니라 정우성이었다. 곽재용 감독의 초고에서 정우성이 본 킬러의 이미지는 <첩혈쌍웅> 같은 홍콩 누아르영화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몸에 배인 화약 냄새가 미안한 남자, 그 죽음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꽃을 기르는 남자 박의는 결코 만만치 않은 킬러다. 사랑하는 혜영의 마음을 가로챈 경찰 정우를 죽이고 싶지만 그녀의 행복을 위해 정우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미칠 듯한 심정을 차가운 얼굴 뒤에 감춘 남자. 그게 모처럼 '내 시나리오'를 만난 정우성이 즐겁게 만들어낸 역할이다.

프로덕션 과정에서 <데이지>에 유위강 식 각색이 가미됐지만 정우성은 박의에게 받았던 처음 느낌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영화는 무거운 감정을 안으로 좀 감추고 덜 무거워 보이게끔 만들었죠. 거기에 네덜란드 촬영이 합쳐지면서 낯선 곳에 있는 사람들의 외로움이 강조돼요. 영화는 시나리오와 많이 달라졌지만 내가 연기한 박의의 캐릭터는 처음 시나리오의 느낌으로 만든 캐릭터예요. 결코 그 박의를 버리지 않았어요.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대사, 그 감정 하나로 만들었으니까." 촬영장에서 직접 카메라를 움직이는 유위강 감독이 그런 정우성의 고집을 세세하게 관찰하며 주시한 덕분에 이젠 어깨와 눈에 혹여 힘이 들어가더라도 폼이 아니라 이유가 있는 정우성의 모습이 <데이지>에 담긴다. 30대의 정우성이 만난 <데이지>은 어쩌면 우리가 가장 기대하던 정우성의 '그럴 듯한' 이미지를 만나게 해줄지도 모른다.

지난해 말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일본 흥행 이후 영화만을 원했던 정우성의 고집이 한류의 중심과 맞닿았다. <데이지>는 지금 가속도가 붙은 아시아권 정우성 열기를 더 뜨겁게 달굴 프로젝트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본인은 담담하다. "영화 한 편의 흥행으로 한류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배우로서의 입지가 넓어지긴 하겠지만 내가 달라지는 건 없어요." 꾸준히 영화 욕심을 보여온 정우성은 <새드무비> <데이지> 그리고 한창 촬영 중인 판타지 무협 <중천>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달리고 있다. <중천>이 끝난 이후의 계획은 아직 없지만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지금처럼 오래 달리는 것. "아직 힘이 있을 때 실컷 달리려는 게 아니에요. 난 어차피 계속 달릴 거니까."

예측 불가능의 영화

<데이지>는 모처럼 작정하고 만들어지는 배우들의 영화다. 정우성과 전지현의 이름값, 정우성과 전지현의 이미지는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다. 수년간 정우성과 전지현의 청춘이 빛나는 '지오다노 CF'가 많은 이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가장 편안하고 가장 싱그러운, 친구 같고 남매 같고 연인 같은 둘의 모습에 사람들은 물론 그들 스스로도 익숙해졌다. 영화를 시작할 땐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그 모습들은 어쩌면 지금 <데이지>의 가장 큰 방해꾼이다. 그들이 함께 한 첫 영화가 그들이 오래 만난 CF 이미지의 연장이 될지 모른다는 선입견과의 싸움. 그것이 <데이지>를 끝내고 난 두 배우의 가장 큰 근심이다. 오빠 정우성이 먼저 입을 연다. "사실 연기할 때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게 맞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전지현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뭘 하기도 전에 이미 다 소진돼 버린 듯한 느낌이에요. 그게 제일 아쉬웠어요. 하지만 정우성 씨가 박의가 돼고 내가 혜영이 되었을 때 자신감이 생겼어요. 역시 최고 호흡의 파트너인 건 분명해요. 친오빠 같고 가끔은 친언니 같으니까."

<데이지>는 유위강 감독의 생각을 많이 담은 인터내셔널 버전과 제작사 아이필름의 깊은 고민을 반영한 한국 버전, 두 가지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세 사람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영화이다 보니 편집 순서에 따라 영화 느낌이 굉장히 달라진다"는 게 정우성의 증언. "더빙 때문에 잠깐 잠깐씩 봤지만 오히려 완성되기 전에는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라니 두 가지 색 <데이지>가 궁금해지는 건 사실이다. "<데이지>는 전형적이지 않아요. 한국 스탭들은 어, 이거 한국영화 아닌데, 하고 홍콩 스탭들은 어, 이거 홍콩영화도 아니야, 라고 해요. 새로운 느낌, 그냥 낯설고 외로운 세 사람의 사랑이 영화에 있어요." 예측 불가능한 영화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들 말마따나 모두 스크린 안에 있다. 정우성과 전지현, 준비는 단단하게 마쳤다.

사진 김춘호 기자
김혜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