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비트>가 개봉했다. 그리고 한국 영화계에 정우성이 왔다. <비트>는 그의 데뷔작이 아니다. 1994년 <구미호>로 은막의 무대에서 초연하였고, 1996년엔 심은하와 투 탑으로 <본 투 킬>을 찍었다. 1996년까지, 그러니까 민이가 태어나기 이전까지의 그가 잘 생긴 청춘스타였다면, 1997년엔 일약 청춘의 아이콘으로 승천한다. 단순한 비주얼(Visual)을 넘어 고유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확립한 것이다. <비트>는 자궁 같은 영화다. 지금 우리가 아는 영화배우 정우성의 근간을 찍어낸 거푸집이다. 이 멋진 남자를 말하기 위해선, <비트>를 피해 갈 수 없다.
정우성은 아름다운 배우다. 가리고 가린 선남선녀들이 득시글거리는 연예계에서도 우뚝 솟은 듯 돋보인다. 흡사 조각칼로 세공한 듯한 이목구비, 190cm에 육박하는 훤칠한 장신. 그는 특별하고 매력적이다. 그 특별함은 분명 외모로부터 비롯하는 것인데, 단지 외모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의 실루엣에는 어떤 균열, 다르게 말하면 틈새와 간극이 깃들어 있다. 선이 굵고 고혹적인 남성성 안에 여리고 예민한 소년성을 품고 있다. 반듯한 광채가 서린 표정 속에 침잠과 공허의 기운이 흐른다. 이를 빚어내는 심연이, 꽉 찬 마스크에 도사린 일말의 여백이자 찢어진 틈새, 마름모꼴로 깊게 트인 ‘눈빛’이다. 이것이 흔해 빠진 귀공자들과 정우성을 구분 지어주는 육체적 자질이며 나아가서는 아우라인데, 그 핵심은 불안과 흔들림, 고립과 배회의 우수에 찬 정동이다. 두 번째 영화 <본투 킬>에서 이미 아웃사이더 역할을 선보인 바 있지만, 하나의 ‘반영웅’적 아이돌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한 작품이 바로 <비트>다. “나에겐 꿈이 없었다.”
김성수 감독은 정우성의 장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배우의 매력을 만개시키기 위해, 카메라의 초점과 연출의 방침을 일목요연하게 정돈하였고, 이는 영화의 스타일리시한 콘셉트와 결부되었다. 적극적인 근접 촬영으로 수려한 얼굴을 포착하고, 종종 명과 암의 조명을 넣어 굴곡을 더했다. 민이가 조직 폭력배와 ‘맞다이’ 붙는 장면 등에선 당시 유행하던 스텝프린팅 기법을 사용했다. 백마 탄 기사처럼 오토바이를 몰고 연인의 반경을 행진하는 로미(고소영)와의 해후 장면에선, 원형의 동선을 따라 트래킹 숏을 구사하며 비틀즈의 ‘렛 잇 비’를 BGM으로 삽입했다. 그 외에도 다분히 장식적 구도를 설정해 시쳇말로 ‘그림’이 되는 포즈를 줄기차게 뽑아냈다. <비트>는 정우성의, 정우성에 의한, 정우성을 위한 영화였다.
<비트>는 방황과 소멸의 서사다. 민이는 반영웅의 기풍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의리 있고, 속이 깊고, 과묵하며, 무척이나 싸움에 능하고, 완벽한 외모를 지닌 데다, 타협하지 않는 윤리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단 하나 무능한 것이 있다면, 대부분의 또래처럼 학업에 관심이 없고 성적이 열등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많은 십대들의 동일시와 선망을 끌어낸 토대이다.) 민이는 세상이 정한 기준과 성공의 가치에 무심하며, 아무런 삶의 지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에겐 꿈이 없었다.”) 아니, 기성세대에 속한 모든 세속적인 것에 환멸의 눈길을 흘기며,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려 가느다란 유막을 겹쌓는다. 그러나 그 유막에는 ‘틈새’가 있다. 뜯어진 구멍을 비집고 살갗에 스며드는 속되고 부정한 기운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번민한다. 이 타락한 세상에 발붙일 수도, 떠나갈 수도 없다는 비애에 잠겨 정처 없이 방황하고 부유한다. 이러한 반영웅의 정서를 재현하는 핵심 장치가 배우 정우성의 몸에 새겨진 틈새, ‘눈빛’인 것이다.
민이는 덧없는 초월의 열망에 젖어있는 인물이다. 그것은 극복이 아닌 배회로서 나타나고 결국엔 소멸로 귀결된다. <비트>는 서사 연결 마디가 헐거운 영화다. 사건의 개연성은 들떠 있으며 민이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오로지 헤매고 가라앉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홀어머니의 외도에 실망하여 집을 뛰쳐나가고, 체벌에 분노하여 교무실을 때려 부순 뒤 학교를 때려치우고, 횡령을 의심하는 속물스런 편의점 점주를 응징하며 떠나버리고, 조폭이 된 친구 태수의 비윤리적 사업방식에 회의하며 조직을 빠져 나온다. 민이는, 소속 집단 내에서 윤리적 딜레마에 부딪힐 때 마다, 집단의 변화를 도모하거나 자신을 적응시키지 않고, 그들의 부조리를 일갈하며 미련 없이 떨쳐 선다. 어디를 가도 낭만(꿈)이 없는 세상 속에서 민이는 차라리 소멸되기를 원하고, 그리하여 해방을 꿈꾸는 듯 보인다. 오토바이 운전대에서 손을 거둔 채 날개처럼 양팔을 펴고 밤의 도로를 질주하는 저 유명한 장면은, 아득한 소실과 비상의 몸짓을 그려낸다. 이야기의 끝에서 - 어쩌면 그가 바랐던 대로 - 민이는 짧은 독백을 남기며 산화한다. 죽음을 통해 생성된 캐릭터의 아우라는 배우의 몸에 온전히 덧씌워졌다. 그만큼 민이는 정우성 본연의 면모를 통해 구축되었고, 둘의 모습은 깊숙이 맞닿아 있었다. <비트>는 영화 안팎을 아우르는 반영웅 정우성을 공고하게 정초한 원점이며, 최선의 방식으로 최고를 보여준 커리어 내 기념비이다.
크게 봤을 때, 정우성은 <비트>가 일구어 놓은 길을 따라 걸어왔다. 하이틴 스타였던 고소영의 악세사리처럼 캐스팅된 데뷔작 <구미호>는 논외로, <본 투 킬>의 길, <비트>의 민, <태양은 없다>의 도철, <유령>의 찬석, <무사>의 여솔, <데이지>의 박의, <중천>의 이곽 등이 대체로 반영웅성에 터 잡은 캐릭터였다. <태양은 없다>와 <무사>는 <비트>의 김성수 감독과 함께 한 작품이었다. 도철은, 민이와 달리 현실적 생존의 문제와 부대끼며 지상에 발 디딘 인물이었다. 여솔은 역시 반항아이되, 보다 입자가 굵고 결이 거친 남성적 인물이었다. (작품성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두 영화는 정우성의 반영웅성을 적절히 변용하며 나름의 초상을 그리는 데 성공한 편이다. 나머지는 작품 자체의 한계로, 또는 배우를 담아낼 적당한 그릇이 되지 못한 채, 미적지근한 자기복제에 머물렀다.
한편 정우성은 필모그라피 사이 나름의 일탈을 시도하며, 운신의 폭을 넓히려 했다. 그 대표적 작품이 2003년 <똥개>였다. 준수한 외모와 기존 이미지를 망가트리며 가히 파격이라 할 만한 변신을 시도하였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1999년 <러브>의 명수, 2009년 <호우시절>의 동하 역으로 소소한 로맨스 연기에도 도전하였는데, 그의 특출한 외모는 담담한 일상성을 표현하기엔 주파수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2004년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이후, 상업적 흥행과 대중의 평가, 양면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고 2008년, 드디어 전기가 찾아온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은 기존의 반영웅성이 다른 차원으로 전개된 작품이다. 이전까지 아웃사이더 정우성의 핵심이 어떠한 결여, 소년성이었다면, <놈놈놈>은 그 틈새를 전제한 채 남성성을 채워 넣는다. <비트>의 민이가 좌표 없이 겉돌며 세상과 불화하는 소년이었다면, 현상금 사냥꾼 도원은 냉소적이지만 유능하고 안정감을 갖춘 어른이다. 여전히 무리와 떨어진 단독자이되, 명확한 삶의 규율을 확립하고, 공동체 바깥에서 공동체와 거래 관계를 유지한다. 두 영화가 정우성의 육체를 다루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김성수 감독이 (비교적) 지척에서 내면의 흔들림을 조명하였다면, 김지운 감독은 다소간 거리를 둔 채 전체적인 실루엣과 기다란 신장이 만들어내는 동선에 주목하였다. 카우보이 같은 중절모와 무릎까지 닿는 코트를 걸치고, 로프에 매달려 건물을 오가며, 말 등에 올라타 개머리판을 돌리며 황야를 질주하는 모습은, 거의 감동적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놈놈놈>은 정우성의 맵시를 새로운 각도에서 전시한 영화이다. 다르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사회와 타협을 이룬, 성장한 아웃사이더의 후일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013년 출연작 <감시자들>은 <놈놈놈> 이후 5년 만에 박스오피스에서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놈놈놈>에서 또 다른 지평을 마련하였다면, <감시자들>에선 또 다시 선회를 시도하였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감시자들>의 제임스는 커리어 최초의 악역이다. 이전까지 정우성의 반영웅들은 나름의 고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설령 폭력을 행사하거나 범죄에 가담할지라도, 죄의식에 뒤척이거나 그를 상쇄할 선량함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은행 강도를 일삼는 범죄단 두목이다. 도덕적 원칙이나 친구에 대한 우정, 연인을 향한 사랑이 아닌, 목적 달성을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사욕에 눈이 멀어 임무를 망친 부하를 가혹하게 응징하며, 범행 장소를 목격한 시민을 가차 없이 살해하고, 자신을 추적하는 수사관을 냉혹하게 제거하며, 배신한 옛 보스의 목숨을 거두어 간다. 영화는, 거기에 정우성만의 특별한 분위기를 덧입혀 놓는다.
<감시자들>은 두 개의 축으로 지탱되는 영화다. 한편에선 수사팀을 중심으로 신참 여형사 하윤주(한효주)의 성장담을 늘어놓고, 한편으론 고독한 늑대 같은 범죄 집단 리더 제임스를 진열한다. 여기서 영화가 의도하는 것은 ‘인물 제임스’의 캐릭터라기보다, ‘배우 정우성’의 이미지이다. <감시자들>은 제임스에게 근접 앵글을 할당하면서도, 얼굴 정면을 곧게 잡는 것은 되도록 피한다. 나이를 먹어가는 남우에게 드리운 세월의 그림자를 숨기고, 가능한 근사한 자태를 뽑아내며 관객을 꾈 무기로 앞장세운다. 제임스에게 독립된 공간을 부여하고, 대부분 원 샷으로 잡으며, 어두운 조명을 쏘아내어, 특유의 ‘틈새’, 고립과 침잠을 드러낸다. 제임스는 항상 부하들과 분리된 채 홀로 행동하고, 자신을 키운 옛 보스(기성세대)의 압제에 대항하는 반항아, 아웃사이더다. 이렇게 볼 때, <감시자들>은 <비트>를 기원으로 하는 배우-이미지로의 원점회귀를 시도하는 영화이다.
90년대는, 터프하면서 섬세한 남성 캐릭터가 각광을 받던 시기였다. <비트>, <태양은 없다>, <질주>, <바이준>, <나쁜 영화>, (좀 더 멀리는) <여고괴담>등 젊음과 혼돈, 일탈의 드라마가 부상했던 시절이다. 돌이켜보면, 정우성 역시 그러한 시대적 흐름이 낳은 스타였을지 모른다. 당시는 냉전의 종식으로 탈이념적 염세주의와 개인주의가 고개를 들었었다. 문화적 자율화가 거세게 물길을 튼 초입이었지만, 사적 영역의 권위주의와 교육 제도의 굴레는 잔존하여 어스레한 간극이 움틀거렸을 것이다. 1997년 IMF를 기점으로, 공황의 나락으로 추락하던 불안 속에서 당대의 청춘들은 자신을 투사하고 의탁할 존재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정우성에겐, 그런 우수와 공허의 차일이 빗기어져 있었다. <비트>의 민이는, 정우성이 젊음의 우상으로 비상할 수 있는 날개가 되어주었고, 그 흔적은 아직까지 인장처럼 홈이 파여 있다.
정우성은 데뷔한 지 20년차를 맞았다. 지금껏 18편의 영화에서 연기했다. 외로운 반영웅 정우성은, 한국 영화의 표현 가능한 인물군을 넓혔다. 배우의 재현이 아닌 배우의 이미지를 활용할 수 있는 선택지를 더한 이들 중 하나이다. 큰 틀에서 수컷과 소년으로 나눌 수 있는 이전 세대와 동세대 미남 스타들에 비해, 둘 사이 미묘하게 걸쳐선 정우성의 이미지는 희소가치를 지녔다. 정우성 이후에도 제 2의, 제 3의, 제 4의 정우성이 등장했지만, 어느 하나 진품의 아우라를 넘어서진 못했다. 거칠게 말하면, 세간에는 자신의 육체로 캐릭터와 공명하는 배우가 있고, 재현을 통해 캐릭터를 빚어내는 배우가 있다. 분명, 정우성은 전자에 속한다. 찬란하게 빛나던 스무 살의 민이는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시간은 젊음을 앗아간다. 용모의 빼어남은 무디어져 갈 것이며, 스타의 후광에도 그늘이 필 것이다. 배우로서 롱런을 꿈꾼다면, 지금껏 이룬 것만큼이나 향후의 도전에 직면해야 한다. 아름다운 남자 정우성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 도전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테다.
배우 정우성’은, 제가 오랜 시간 흠모해 온 유일한 ‘연예인’입니다. 여자도 아닌 남자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그의 매력이란 무엇일까. 이 글은 그런 자족적 질문과 호기심에서 시작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