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를 감춘 채 범죄자들을 쫓는 경찰 특수 조직 감시반의 이야기를 그린 '감시자들'에서 정우성은 범죄 조직의 리더 제임스로 분한다. 4년 만에 한국 영화의 배우로 관객을 찾는 정우성은 분량을 압도하는 존재감으로 스크린을 누볐다. 멋들어진 외모에 날카로운 눈빛, 망설임 없이 상대의 경동맥을 찌르는 재빠른 액션은 그의 악역 변신에 '왜 이제야'라는 아쉬움 섞인 감탄을 내뱉게 만든다.
지난 6월27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정우성을 만났다. 직접 연기한 '감시자들'의 악역 제임스에 대한 이야기부터 자신에 의해 끝없이 업데이트되고 있는 흥행 공약의 비밀, 차기작 '나를 잊지 말아요'의 주연과 제작을 맡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소재를 넘나드는 수다가 시작됐다.
영화에서 정우성이 맡은 제임스는 최첨단 기술과 엘리트 인력으로 정비된 감시반의 추적을 비웃듯 따돌리는 인물이다. 멜로와 무협, 액션을 오가며 폭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 그지만 전사(前史)조차 없는 악역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까만 코트를 입고 지체없이 상대의 목과 복부를 찌르는 제임스의 얼굴에서 달달한 멜로 드라마 속 정우성의 얼굴은 없다.
영화에서 그는 사연 있는 악역으로 연민을 자아내는 대신,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확실한 악인(惡人)이 되길 택했다. "욕심 때문에 10년을 버렸다"는 의미심장한 대사, 막바지에 공개되는 과거의 사진 외에 관객은 그의 과거를 구체적으로 추측할 어떤 단서도 얻지 못한다.
"악행을 하기 위한 제임스의 전조를 길게 주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은 했는데 감독에게 '어차피 죽일 거, 악한이 악한을 죽이는데 빨리 하자'고 제의했고 감독도 그에 동의했죠.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 적절하게 들어간 것 같아요. 아마 촬영할 때 감독이나 제작사 측에서 영화를 위해 제임스의 이야기를 살려보자고 했더라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했을 거에요. 현명하게 협의를 봐서 과하게 욕심을 내지 않았고, 그게 적당하게 효과를 발휘했던 것 같아요."
'감시자들'은 '일단 뛰어' '조용한 세상'의 연출을 맡은 조의석 감독과 '호우시절' '푸른소금' 위험한 관계' 등에서 촬영 감독으로 활약한 김병서 감독이 함께 메가폰을 잡았다. 두 감독 모두 약 20년 간 연기를 해 온 정우성에겐 영화계 후배들이다. 뮤직비디오와 단편 영화 등을 연출하며 감독으로서 활약하기도 한 만큼 정우성은 두 감독들에게 '작업하기 편하면서도 어려운' 배우였을 법하다. 정우성 역시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영화계 선배이긴 하지만 감독님들을 후배 혹은 나이 어린 감독으로 대하진 않았어요. 내 경력이 이들에게 나를 선배로 보게 만들고, 함부로 못할 대상으로 만든다는 걸 아니까 조금 더 조심스러웠죠. 요구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끔, 물음표를 달아 조심스럽지만 명확하게, 그리고 부담스럽지 않게 의견을 내곤 했어요."
'감시자들' 개봉을 앞두고 정우성은 릴레이 GV와 네이버 라인 스타채팅 등을 통해 관객들과 직접 호흡하고 있다. 영화의 공식 석상에 설 때마다 쏟아지는 흥행 공약 질문에, 그는 매번 수치를 특정해 다른 이벤트를 내걸어 관객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900만 관객을 돌파하면 서울 명동에서 프리허그를 하기로, 1천만 관객을 넘어서면 GV를 열었던 성신여자대학교를 다시 찾아 상반신을 탈의하기로 했으니, 흥행이 될수록 배우 정우성이 할 일은 많아질 전망이다.
그는 "공약을 업데이트하며 너스레를 떨지만 '최소한 얼마는 들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다"며 "사실 몇백만 관객을 잡고 흥행 공약을 이야기했던 것이 처음"이라고 알렸다. "흥행이라는 건 늘 우리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을 이어간 정우성은 "'무사'(2001)의 경우, 처음 1주일 동안은 흥행이 잘 됐었지만 개봉 일주일만에 9.11 테러가 있었고 뉴스에선 시민들에게 '사람이 많은 곳에 가지 말라'는 지침을 주기도 했었다"고 속쓰린 과거를 돌이켰다.
"몇백만 명의 수치를 걸었는데 그만큼 관객이 들지 않으면 '정우성이 상처 입었겠다'는 반응이 돌아와요. 그래서 그런 기대를 안 갖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작품에 최선을 다했나? 오케이, 여기까지'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에요. 투자자나 제작자에겐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배우 입장에선 마음을 비워놓고 있어야 해요. 사실 지난 몇년 간 한국 영화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졌고 그 기간동안 동료로서 다른 배우들의 영화가 잘 되는 것을 보며 내심 부럽기도 했어요. 공약들을 실행할 수 있게만 된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약속한 걸 다 할 거에요. 정말로 다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죠.(웃음)"
'감시자들'은 테헤란로와 이태원, 청계천, 신당, 삼각지 등 서울의 특정 지역들이 영화의 중요 배경으로 등장해 시선을 모은다. 정우성은 "경제가 어려울 때는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가 어떤 곳에 살고 있는지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지만 점차 풍요로워지니 도시에 대한 자랑스러움도 느끼게 된 것 같다"고 알렸다.
"외국 영화들을 보면 도시 자체가 인물을 담고 있는 주인공이 되기도 하잖아요. 우리 나라도 영화를 통해 서울을 자랑할 수 있게 된 거죠. 특정 도시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슬슬 나올 때가 된 것 같아요. 서울 뿐 아니라 부산이든 대구든 말이에요. 도시가 인물과 호흡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정우성은 차기작으로 영화 '신의 한 수'를 선택했다. 나락으로 떨어진 바둑 기사의 복수극을 다룬 이야기다. 영화에서 정우성은 자신의 특기인 액션 연기를 원 없이 펼칠 계획이다. 또 다른 차기작으로는 제작과 주연을 겸한 미스터리 멜로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가 있다. 정우성에 대한 '팬심'이 짙은 이윤정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스크립터 출신인 이 감독은 정우성의 격려로 동명의 단편 영화를 장편으로 다시 만들게 됐다. 단편 '나를 잊지 말아요'는 지난 2011년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관객을 만난 바 있다.
"'나를 잊지 말아요'의 주인공 이름은 제 이름의 약자를 딴 더블유(W)에요. 그래도 제게 주연을 맡기긴 미안했었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장편으로 다시 써 보라고 제안했어요. '그러고 나서 나에게 제의하는 느낌으로 시나리오를 달라'고 이야기해줬죠. 그렇게 용기를 내지 않으면 선후배 세대 간 협업이 되지 않는다고도 말했어요. 시나리오와 장르가 특이해요. 새로운 자극이 있는 영화여서 주연도 제작도 제가 맡게 됐죠. 후배들과 함께 하는 것, 후배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선배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이런 후배들이 용기를 내서 저 아닌 다른 선배들에게도 시나리오를 건네고. 제2의 케이스가 나오겠죠. '나를 잊지 말아요'가 그런 바람직한 롤모델이 됐으면 해요."
'감시자들'은 정체를 감춘 채 흔적조차 없는 범죄 조직을 쫓는 감시 전문가들의 추적을 그린다. 설경구·정우성·한효주·이준호 등이 출연한다. 지난 3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